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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총선 앞두고 존재감 키우는 탁신

조회수 : 1160 2019.02.14

잠시 뜸해 ‘잊혀진 남자’로 사는 가 했던 탁신 전 총리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2006년 UN 총회에 연설하러 간 사이 군사 쿠데타가 발생해 권좌에서 밀려난 뒤 13년 째 해외도피 중.  그런데  지난 1월 14일부터 ‘좋은 월요일(굿 먼데이)’이란 인터넷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총선을 앞두고 있는 태국인 터라,  한 동안 침묵하며 해외에서 살고있는 탁신의 등장은 여러 해석과 전망을 낳고 있다. 

탁신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세계의 변화와 함께 12년 간 해외에서 살아가는 동안 선진국과 후진국을 여행하고, 수많은 기업인과 정치인을 만난 이야기를 다룰 것’이라고 밝혔다.  팟캐스트 개설 소식이 알려진 탁신의 페이스북 글에는 순식간에 5만여 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댓글은 2천여개나 달렸다. 탁신의 팟캐스트가 시작되자 태국 정치학자들을 중심으로 탁신이 총선의 임박과 함께 현 집권 군부에 맞서며 ‘정치의 장’으로 나오고 있다는 뉘앙스의 해석을 내놓고 있다. 

2000년 이후 태국 현대 정치는 친(親)탁신과 반(反)탁신의 대결구도가 반복되고 있다. 스스로 정치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어쩌던가.  탁신 그 자체가 태국 정치의 핵(核)인 걸. 

1949년 생.  올해 꼭 70세 되는 탁신의 인생은 ‘파노라마’ 라는 말이 적절하다. 그의 인생은 14년 간의 경찰,  7년 간의 사업가, 12년 간의 정치인, 13년 째의 해외도피 망명생활로 요약된다.   그의 모든 인생 과정이 솜씨  좋은 ‘작가’가 몇번을 고쳐 완성한 반전의 반전 드라마 대본을 보는 느낌이다. 빚더미에 앉았던 탁신은 길지 않은 시간에 태국 최고의 재벌에 반열에 올랐고,  짧은 시간에 태국 최고의 권력을 쥐었으며,  자신의 인생의 뒷부분을 해외도피로 이어가고 있다. 

잘 알려졌지만 탁신의 첫 직업은 경찰이었다.  38세 팔팔한 나이로 퇴직하기 까지 14년간 경찰복을 입었다.  퇴직 당시 계급은 우리 군대식으로 말하면 중령 정도였다.  경찰서장도 아니고 경찰서 기획 국장이었다.  당시엔 그래도 됐는지 모르지만, 경찰을 그만두기 5년 전부터 사업도 했다. 비단 가게, 영화관, 아파트건축에도 손을 댔지만 모두 까먹고 당시로는 엄청난 5천만 바트(한화 18억원)의 빚만 졌다. 이는 자기가 한 말이다. 

처가 복이 있었다.  탁신이  경찰에 있을 때 그의 장인은 장성급 경찰 간부였다.  그 덕이었는지 모르지만,  경찰 그만두기 전에 정부기관과 경찰서에 컴퓨터를 납품하는 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경찰 그만 두던 1987년 자신이 관여한 ‘반 싸이 텅’이라는 멜로 영화가  대박을 치고, 1988년부터는 사업운도 풀렸다.   1989년에는 IBC라는 케이블TV를 설립했고, 그 해  네트워크서비스 ‘신나왓데이타콤’을 설립하며 그야말로 돈을 갈퀴를 긁기 시작했다.  1990년 통신위성까지 쏘아올리며 경제적 큰 성공을 이어가던 당시 가까운 사람은 언론, 미디어를 담당하던 찰럼 유범룽 총리실 장관이었다.   

태국 재벌로 부상한 탁신은 1994년엔 관계에 입문해 외무부장관에 임명됐다.  경찰 그만 두고 사업한지 7년 만인 45세 때였다.  경찰 중령에서 7년 만에 국무위원의 중책인 외무장관이 된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탁신의 상승세는 그것이 시작일 뿐이었다. 정치에 발을 들인 지 4년 만인 1998년, 그의 나이 49세이던 해에 아예 신당을 창당했다. 오늘날 까지 이름만 바꿨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타이락타이 당이다.  IMF 등 태국 경제적 침체기에 탁신은 CEO 총리를 표방하며 몰아 부쳐 52세가 되던 2001년에는 태국 23대 총리로 당선되었다.   정치에 입문한 지 7년 만이었다.  경찰 제복을 벗은 지는  14년 만 이었다.  이 사이 탁신은 태국 재벌+태국 최고 권력이란 두마리 도끼를 잡는 ‘기네스북 신기록 같은’ 일을 이뤄낸 것이었다. 

2005년에는 태국 첫 재선총리로 기록됐다.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쌀농사 지역으로 , 가난하지만 유권자가 많은 동북부에선 특히 대단했다.  30바트 의료보험 실시 등의 저소득층을 위한 정책을 펼쳤고, 마약과의 전쟁 등을 통해 강력한 사회정화 정책을 펼쳤다.  태국 동북부 지역은 인공강우로 비를 뿌리고, 평생을 농어촌과 극빈자 구호를 위한 삶을 산 푸미폰 국왕이 가장 큰 인기가 있던 곳이었다. 

탁신이 정치인으로 승승장구 한 것도 따지고 보면 엄청난 재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재산은 경찰과 관련되어 운이 트기 시작한 것이며, 이후의 모든 사업들도 모두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비판가들은 탁신이 모든 사업부분에서 어떻게 정부의 허가를 따냈을까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총리가 된 뒤에도 법과 법령을 자신 가문의 기업인 친 코퍼레이션을 위해 개정하거나 유리하게 했다고 보는 게 반탁신파들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재선 총리가 된 탁신이 UN 연설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한 2016년 9월 태국에선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방콕 서부 칸차나부리의 육군들이 탱크 10여대 들이밀고, 군인들이 방송국을 장악해 성공시킨 무혈 쿠데타였다. 이 때 손티 육군참모 총장은 TV를 통해 이런 성명을 발표했다. 

"태국이 이처럼 양분되기는 태국역사에 없었다. 이 정부로 인해 부패가 창궐했으며, 이 정부는 자기의 사람들에게만 이득을 주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 정부가 태국을 계속 관리하면 태국역사에 나쁜 영향을 줄 것 같아 군인이 나섰다. 우리는 나라가 정상화되면 다시 돌아가 본연의 임무를 다하겠다. 국민들은 이 같은 우리의 입장과 뜻을 지지해 주기를 부탁한다." 당시 쿠데타 발발 직전, 탁신은 부패혐의와 함께 왕궁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반팔을 입는 등 국왕에 대해 불손했으며 대통령제를 희망했다는 등의 이야기도 신문에 나온 것을 기억한다. 

탁신은 쿠데타 직후 해외에서 떠돌다 쿠데타 발발 17개월 만인 2008년 2월 28일 오전 9시45분 타이항공편으로 수완나품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군부와 사전 조율이 됐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공항에 도착한 탁신은 마치 동토의 땅을 찾은 교황처럼 땅에 입을 맞추며 감격해 했다. 권력남용 혐의로 궐석재판을 받고 2년형을 선고받으며 납작 엎드려 있던 탁신은 귀국 후 바로 보석으로 풀려나 집에 머물렀다. 그러다 그후 6개월 뒤인 2008년 8월 베이징 올림픽에 VIP로 참가한다고 출국했다가 2019년 현재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가 태국을 비운 사이 비 정치인이었던 막내 여동생 잉락이 선거에 의해 총리가 됐다 탄핵당했고, 자신이 만든 타이락타이 당의 후계자들이 당의 명칭을 이리저리 바꾸며 그 뒤를 이어 나갔다. 반 탁신파들이 헌법을 여러조항 수정하며 탁신을 견제했지만 탁신파 들은 '선거의 신'이었다. 선거는 곧 탁신파들의 승리로 이어졌다. 아니 동북부의 가난한 유권자들이 탁신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것 같았다.

 탁신이 축출된 2006년과 거의 다르지 않은 정치대결 속에 2014년엔 태국 19번째 무혈쿠데타(선언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태국 군사정권은 정치활동을 금지시켰으며, 총리의 선출 등에 관한 헌법을 손질한 뒤 쿠데타 4년만에 민정이양을 위한 총선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쿠데타의 빌미가 된 부정부패와 직권남용에도 불구하고 탁신의 귀국 당시 태국 여론조사기관의 발표에선 태국인의 67%가 탁신을 좋은 이미지로 기억한다고 했다. 그를 ‘정말 그리워했다’고 대답한 사람도 46%나 됐다. 탁신이 쿠데타에서 물러난 뒤 올해로 13년 째가 되고 있다. 강산도 바뀐다는 만큼의 긴 세월이 흘렀고, 태국의 최근 몇 년은 큰 시위가 없는 '표면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어 외국인 살기는 좋다. 탁신은 태국에 있든, 해외 도피 중에 있든지 태국정치를 앞에서 뒤에서 ‘쥐락펴락’ 해 온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총선을 앞둔 그의 등장이 태국 정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보통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과연 세월 이기는 장사는 없는 걸까?